신라(新羅)는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왕국 중 하나이다.[5][6][7][8]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王)이라는 왕호(王號)를 쓰기 전에는 군주를 방언으로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서기 503년(지증왕 4년)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라는 의미의 신라(新羅)로 확정했다.[9][b]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했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다.[11]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과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9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했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도는 계승·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8세기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극성기를 달성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중반부터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편입하기로 귀순하였다. 그로써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동안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을 닫게 되었다. 진한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도 충지 잡간(匝干), 아간(阿干)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국호 한국의 역사 선사 시대 고조선 시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통일 왕조 시대 근현대 vte 사로국(斯盧國) ·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 · 서라벌(徐羅伐) · 서야(徐耶) · 서라(徐羅) · 서벌(徐我) 등 여러 한자 가차자와[12], 계림(鷄林) 등으로도 불렸으나, 503년(지증 마립간 4년) 한자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 고유어에서 중국식의 “왕”으로 바꿨다. 당시 여러 민족에 한자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등 여러 민족이 한자식 이름과 호칭을 썼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9][b]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거나,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습니다.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쫓았다.[9]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지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쇠’(鐵, 黃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c]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다. ‘서라벌’은 ‘서라’에 넓은 땅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이다. ‘라’의 모음이 약해져서 탈락하면 ‘서르벌’, ‘서벌’이 된다. ‘라’의 자음이 약해지면 ‘서야’가 된다.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조(9년 봄 3월 기사)에 기술되어 있다.[13]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d]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e] 역사 시대 구분 고려시대에 만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라 신라 천년을 3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상대(上代: 1대,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 기원전 57년~서기 645년, 28대 약 730년간)는 성골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이다.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 왕실이 확립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건국 이후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과 함께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던 시기이다. 상대(上代)는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관통하며, 이때는 신라 문화의 황금기로 해외의 여러 국가와 교역한 시기이기도 하다. 중대(中代: 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 654년~780년, 8대 130년간)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진골 왕통이 시작되는 시대로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왕조(統一王朝)가 확립되어, 신라가 경제·문화에서 극성기를 이룬 시대이다.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년~935년, 20대 약 160년간)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이 등장으로 신라가 약해지던 시기이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불교와 연관하여 상고·중고·하고로 신라사를 구분했다. 상고(上古: 1대,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왕, 기원전 57년~서기 514년, 22대 약 600년간)는 불교 전래 이전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를 구분할 때 사용된다. 중고(中古: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514~654년, 6대 140년, 약 100년)는 불교식 왕명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골품제 하에 성골 왕실이 성립되어 소멸하기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하고(下古: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 654~935년, 28대 281년, 약 300년)는 불교식 왕명 사용이 끝난 이후의 시기이다. 하고 시기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편, 신라의 역사를 5기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때는 내물왕 이전의 시기(기원전 57년~356년)를 제1기,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까지(356년~514년)를 제2기,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514년~654년)를 제3기, 제29대 태종무열왕부터 제36대 혜공왕까지(654년~780년)를 제4기, 제37대 선덕왕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780년~935년)를 제5기로 잡는다.[11] 신라의 성립 서기 200년경의 사로국 강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혁거세 거서간 원년) 4월 28일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6][7][8]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고조선계통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11] 이처럼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했다. 기원전 27년(혁거세 거서간 31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석·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임금)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居道)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14]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 마립간[f](재위: 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11]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시대와 명칭이 바뀌어 예전과 다르다' 하였는데 국력의 강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자주 당했는데, 특히 390년대에 여러 차례 왜의 침입을 받았다. 399년(내물 마립간 44년; 광개토왕 9년)에는 왜[g](가야·왜·백제 연합군)가 신라에 침입하자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19][20][21],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11][21][22] 신라의 정치적 발전 서기 300년경의 판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23][24], 율령 반포, 공복 제정[25]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26]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27]함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532년(법흥왕 19년)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했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했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했다.[11] 신라의 팽창 서기 576년. 진흥대왕의 정복 전쟁으로 확장한 신라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51년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11]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553년(진흥왕 14년), 이를 토대로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는 562년(진흥왕 23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했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나라·당나라와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11]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위기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했다.[11]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이후에 잃어버렸으며, 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대인 64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으로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인 대야성까지 빼앗기며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의 삼국통일 및 나당 전쟁입니다. 서기 830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통일신라 신라의 삼국통일은 676년(문무왕 16년)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당나라를 격퇴한 것을 말한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무열왕 7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문무왕 8년)에 멸망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신라는 675년(문무왕 1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렇게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삼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또한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며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9주 5소경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했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태종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큰 성과를 올려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했다. 이때부터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했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했다. 이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했다.[28] 이후 685년(신문왕 5년)에 제13등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 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 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했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는 부가 크게 축적되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했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신라의 중흥을 이끌었던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났다.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며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동반도나 장쑤성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나라 조정의 지방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했다. 782년(선덕왕 3년) 패강진(浿江鎭)[29], 828년(흥덕왕 3년) 청해진(淸海鎭), 829년(흥덕왕 4년) 당성진(唐城鎭), 844년(문성왕 6년) 혈구진(穴口鎭)[h] 등이 그것이다. 그중 828년(흥덕왕 3년)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했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했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을 비롯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해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후삼국의 성립 후삼국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서기 915년 신라 경순왕의 실제 어진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호족 출신이자 태봉의 장군이었던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적극적으로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했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935년(경순왕 9년) 10월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했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 다했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0]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31]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32] 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마의태자와 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33][34]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온다.[30]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30],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32] 통치 제도
신라(新羅)는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왕국 중 하나이다.[5][6][7][8]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王)이라는 왕호(王號)를 쓰기 전에는 군주를 방언으로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서기 503년(지증왕 4년)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라는 의미의 신라(新羅)로 확정했다.[9][b]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했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다.[11]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과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9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했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도는 계승·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8세기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극성기를 달성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중반부터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편입하기로 귀순하였다. 그로써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동안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을 닫게 되었다.
진한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도 충지 잡간(匝干), 아간(阿干)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국호
[편집]한국의 역사 |
---|
![]() |
사로국(斯盧國) ·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 · 서라벌(徐羅伐) · 서야(徐耶) · 서라(徐羅) · 서벌(徐我) 등 여러 한자 가차자와[12], 계림(鷄林) 등으로도 불렸으나, 503년(지증 마립간 4년) 한자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 고유어에서 중국식의 “왕”으로 바꿨다. 당시 여러 민족에 한자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등 여러 민족이 한자식 이름과 호칭을 썼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9][b]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지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쇠’(鐵, 黃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c]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다. ‘서라벌’은 ‘서라’에 넓은 땅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이다. ‘라’의 모음이 약해져서 탈락하면 ‘서르벌’, ‘서벌’이 된다. ‘라’의 자음이 약해지면 ‘서야’가 된다.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조(9년 봄 3월 기사)에 기술되어 있다.[13]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d]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e]
역사
[편집]시대 구분
[편집]고려시대에 만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라 신라 천년을 3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 상대(上代: 1대,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 기원전 57년~서기 645년, 28대 약 730년간)는 성골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이다.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 왕실이 확립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건국 이후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과 함께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던 시기이다. 상대(上代)는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관통하며, 이때는 신라 문화의 황금기로 해외의 여러 국가와 교역한 시기이기도 하다.
- 중대(中代: 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 654년~780년, 8대 130년간)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진골 왕통이 시작되는 시대로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왕조(統一王朝)가 확립되어, 신라가 경제·문화에서 극성기를 이룬 시대이다.
-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년~935년, 20대 약 160년간)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이 등장으로 신라가 약해지던 시기이다.
삼국유사
[편집]《삼국유사》는 불교와 연관하여 상고·중고·하고로 신라사를 구분했다.
- 상고(上古: 1대, 박씨의 시조 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왕, 기원전 57년~서기 514년, 22대 약 600년간)는 불교 전래 이전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를 구분할 때 사용된다.
- 중고(中古: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514~654년, 6대 140년, 약 100년)는 불교식 왕명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골품제 하에 성골 왕실이 성립되어 소멸하기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 하고(下古: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 654~935년, 28대 281년, 약 300년)는 불교식 왕명 사용이 끝난 이후의 시기이다. 하고 시기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편, 신라의 역사를 5기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때는 내물왕 이전의 시기(기원전 57년~356년)를 제1기,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까지(356년~514년)를 제2기,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514년~654년)를 제3기, 제29대 태종무열왕부터 제36대 혜공왕까지(654년~780년)를 제4기, 제37대 선덕왕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780년~935년)를 제5기로 잡는다.[11]
신라의 성립
[편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혁거세 거서간 원년) 4월 28일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6][7][8]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고조선계통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11] 이처럼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했다. 기원전 27년(혁거세 거서간 31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석·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임금)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居道)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14]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 마립간[f](재위: 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11]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시대와 명칭이 바뀌어 예전과 다르다' 하였는데 국력의 강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자주 당했는데, 특히 390년대에 여러 차례 왜의 침입을 받았다. 399년(내물 마립간 44년; 광개토왕 9년)에는 왜[g](가야·왜·백제 연합군)가 신라에 침입하자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19][20][21],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11][21][22]
신라의 정치적 발전
[편집]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23][24], 율령 반포, 공복 제정[25]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26]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27]함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532년(법흥왕 19년)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했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했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했다.[11]
신라의 팽창
[편집]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51년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11]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553년(진흥왕 14년), 이를 토대로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는 562년(진흥왕 23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했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나라·당나라와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11]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위기
[편집]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했다.[11]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이후에 잃어버렸으며, 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대인 64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으로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인 대야성까지 빼앗기며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편집]
신라의 삼국통일은 676년(문무왕 16년)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당나라를 격퇴한 것을 말한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무열왕 7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문무왕 8년)에 멸망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신라는 675년(문무왕 1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렇게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삼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또한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며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편집]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했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태종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큰 성과를 올려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했다. 이때부터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했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했다. 이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했다.[28] 이후 685년(신문왕 5년)에 제13등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 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 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했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편집]8세기 후반 신라는 부가 크게 축적되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했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신라의 중흥을 이끌었던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났다.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며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동반도나 장쑤성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나라 조정의 지방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했다. 782년(선덕왕 3년) 패강진(浿江鎭)[29], 828년(흥덕왕 3년) 청해진(淸海鎭), 829년(흥덕왕 4년) 당성진(唐城鎭), 844년(문성왕 6년) 혈구진(穴口鎭)[h] 등이 그것이다.
그중 828년(흥덕왕 3년)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했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했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을 비롯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해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후삼국의 성립
[편집]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편집]호족 출신이자 태봉의 장군이었던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적극적으로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했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935년(경순왕 9년) 10월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했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 다했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0]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31]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32]
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마의태자와 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33][34]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온다.[30]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30],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32]
댓글
댓글 쓰기